[회고] 2023년 중반기 회고 - 접점

Overview

2023년 중반기 핵심 경험을 회고하고 앞으로 나아갈 길을 생각해 본다.

세계관의 확장

20대의 절반 동안 컴퓨터라는 언어로 세상을 보았다. 컴퓨터 외의 것들은 별로 아는 것이 없었다. 무지는 나의 삶을 잿빛으로 만들었다. 세상 밖에서 무엇을 봐야 할지도 어떻게 즐겨야 할지도 몰랐기 때문이다. 컴퓨터 프로그래밍만 잘하면 되겠지. 지난 5년간의 생각이었다. 지금은 생각이 달라졌다. 인간이 컴퓨터에 담은 생각은 어디에서 왔는지 질문을 던지고 있다.

소프트웨어 개발과 실력

프로그래머는 무엇을 하는 사람일지 생각해 봤다. 기계적으로 보면 컴퓨터 메모리에 낙서하는 사람들일지도 모른다. 다만, 낙서에 담긴 추상적 의미에 따라서 세상을 바꾸는 작품이 되기도 한다. 전통적 관점에서 글을 쓰는 작가가 유사하다고 느껴진다. 기계적으로 보면 작가는 종이에 활자를 남긴다. 워드 프로그램을 이용해 컴퓨터로 타이핑하기도 한다만 결국은 종이에 인쇄되어 출판된다. 글을 통해 사람들이 웃고 울고 깨우치게 만든다. 그리고 세상을 움직인다.

개발 실력은 무엇인가?

소프트웨어 개발 실력이 높다는 것은 무엇일까? 글쓰기에 비유해서 생각해 보았다. 글감을 잘 찾는 것일까? 글감을 글에 잘 녹여내어 독자의 공감을 얻는 것일까? 글이 잘 읽히도록 문단을 나누는 것일까? 철저하게 한글 맞춤법을 지키는 것일까? 모든 조건을 충족한다면 좋은 글일 가능성은 높을 것 같다. 좋은 글이라고 단정 지을 수는 없지만 말이다.

소프트웨어 개발자는 실력을 갖춰야 한다. 학교부터 시작되어 세상으로 나온 지금까지 꾸준히 듣는 말이다. 다만, 좋은 실력을 갖췄다는 말은 여전히 정의가 불분명하다. 그래서 실력을 갖춘 소프트웨어 개발자는 무엇인지 지금도 모르겠다. 실력에 관하여 고민하던 중 우연한 계기로 다른 분야에서도 비슷한 고민을 한다는 점을 알게 되었다.

드라마에서 묘사한 성장

OTT 서비스의 인기차트를 찾아보았다. 일본 후지 TV에서 상영한 드라마 "바라카몬"이 눈에 띄었다. 간략히 줄거리를 소개해본다. 주인공인 한다 세이슈는 유명 서예가 아버지의 뒤를 이어서 서예가가 되고자 노력한다. 도쿄에서도 실력파 서예가로서 알려져 있는 인물이었다. 한 번은 서예 전시회에 작품을 전시하였다. 전시회에서 한다의 작품을 감상하던 인물 중에는 관장이 있었다. 관장은 한다의 작품이 교과서적이라는 말로 혹평을 남겼다. 한다는 혹평에 감정을 못 이겨 관장을 때려 눞였고 나가사키현의 고토섬으로 유배를 가게 되었다.

한다는 시골 마을에서 자신이 쓰는 글씨에 관하여 고민한다. 트라우마로 남은 교과서적 글씨에서 벗어나 사람들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자신만의 글씨를 찾게 된다. 과정은 순탄하지 않았다. 한다는 도시 느낌의 개인주의 성격을 지닌 사람이었다. 고토섬의 사람들은 낯을 가리는 한다가 도움을 구하지 않아도 먼저 도와주었다. 좋은 것들을 선뜻 먼저 나누어주었다. 초기에 한다는 적응하기 힘들어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마을 사람의 이타적인 행동에서 교훈을 얻으며 시골 마을 생활에 적응하게 된다. 그리고 시골 마을 생활의 일화가 거듭되면서 한다의 글씨가 발전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인상 깊은 장면들

작품을 보고 머릿속에 남은 몇 가지 장면들이 있다. 고토섬의 해 질 녘 노을을 보는 순간이었다. 한다의 앞에는 담으로 가려져 있어서 노을을 볼 수 없었다. 동네 꼬마 아이였던 나루는 담장을 넘어야 보일 것들을 이야기하며 한다를 응원해 주었다. 한다는 마침내 담장을 넘어 아름다운 저녁노을을 보게 되었다. 힘든 시기를 노력해서 이겨내면 따듯한 봄이 온다는 느낌이 전달되었다. 삶의 용기를 주었다.

한 번은 한다가 마을 사람들에게 수확물을 나누어주고 집으로 돌아가는 날이었다. 산을 따라 내려오던 중 발을 헛디뎌 산 중턱으로 굴러 떨어지게 된다. 구조대를 기다리던 중 하늘 보았다. 수많은 별이 보였고 그 순간 마을 사람들이 한다를 구하러 왔다. 집에 돌아온 한다는 글씨를 썼다. 별 성(星) 자가 음각으로 빛나고 있었다. 정석적으로 글씨를 쓰던 주인공이 창의적인 글씨를 쓰는 순간이었다. 계기는 세상에서의 경험이었다. 질서에 얽매이지 않았다. 글씨를 보면 진짜 별이 보였다.

마지막으로 한다가 동네에 습자 학당을 세우고 아이들에게 글씨 쓰는 방법을 알려주는 장면이었다. 처음에는 당황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끝내 밖에서 꽃을 준비해 와 아이들의 종이 위에 올려주었다. 그리고 아이들이 꽃을 피해 글씨를 쓰도록 가이드를 해주었다. 하나씩 직접 알려주기보다 가이드를 통해 스스로 깨우칠 수 있도록 가르치는 모습이 보였다. 제자들을 통해 한다는 또 다른 자신만의 글씨를 쓰게 되었다.

소프트웨어 실력을 돌아보다

예술가의 삶을 살펴보았다. 끊임없이 성장을 갈망하고 더 좋은 작품을 향해 달려가는 모습이 보였다. 프로그래머의 길을 걷는 스스로의 삶과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작품 속에서 주인공은 자신만의 개성 있는 글씨를 쓰고 싶어 했다. 세상의 경험이 쌓이면서 글씨에 담긴 의미가 풍성해졌다. 필자가 소프트웨어를 개발할 때에도 너무 기본기에만 몰두한 것은 아니었을까? 세상과 소통하며 내공을 쌓고 자신만의 디자인을 창조할 수 있는 소프트웨어 개발자로 성장하고 싶다.